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국방군/원수 (문단 편집) == 목록 == [include(틀:독일 국방군/원수)] 아래 목록의 나열 순서는 진급일 순이다. ||<-8> Generalfeldmarschall (육군,공군) / Großadmiral (해군) || || 이름 || 병과 || 출생년도 || 사망년도 || 진급일 || 사망 원인 || 비고 || 특이사항 ||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 육군 || 1878 || 1946 || 1936.04.20 || || 전쟁 전 퇴역 및[br]2차대전 불참[* 그 이유는 1938년의 블롬베르크-프리치 스캔들에 연루되어서였으며, 이후 히틀러에게 복귀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하고 전쟁 기간 내내 야인 신세였다. 참고로 같이 퇴역한 프리치는 다시 복귀 하였으나 [[폴란드 침공]]에서 전사한 데다, 사후에는 폴란드에 있던 무덤까지 파괴되고 말았다.] || 나치 독일 및[br]육군 최초의 원수 || || [[헤르만 괴링]] || {{{#blue 공군}}} || 1893 || 1946 || 1938.02.04 || 자살 || 유일한 제국원수[br]수여자 || || || [[에리히 레더]] || {{{#red 해군}}} || 1876 || 1960 || 1939.04.01 || || [* 크릭스마리네가 활동하던 당시에 군종 내 최선임 장교였다.] || ||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육군 || 1875 || 1953 ||<|12> 1940.07.19 || || [* 독일 국방군 육군이 활동하던 당시에 군종 내 최선임 장교였다.] || || || [[귄터 폰 클루게]] || 육군 || 1882 || 1944 || 자살 || [* 발퀴레 작전 소극 가담자. 훗날 이 때문에 [[자살]]하게 된다.] || || || [[발터 폰 브라우히치]] || 육군 || 1881 || 1948 || || [* 블롬베르크 숙청 후 육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역시 숙청되었다.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 있는 젊은 장교를 대거 발탁, 전간기에서부터 독일군 무적 신화의 기틀을 쌓았다.] || || || [[발터 폰 라이헤나우]] || 육군 || 1884 || 1942 || 심장마비 || [*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원수 지휘봉을 거머쥐었지만, 장군들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열성적인 나치였다.] || || || [[빌헬름 카이텔]] || 육군 || 1882 || 1946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전범으로 처형]][br]([[교수형]]) || [* 1차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고참 장교이지만, 사실 정치꾼에 더 가깝다. 모나지 않은 인품을 지녔으나, 히틀러의 예스맨으로서 '''독일군 최악의 졸장이었다.'''] ||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육군 || 1876 || 1956 || || [*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히틀러의 학살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임했다고는 알려져 왔으나 예비역 생활 중에도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참여하였고 사적으로 히틀러에게 수십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선물 받고 세금조차 내지 않았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3년 형을 선고되었으나 기소 기간이 3년이 되었기에 실질적인 수감 생활은 하지 않았는데, 레닌그라드 봉쇄 당시 '학살보다 굶겨 죽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논조로 이를 두둔한 것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 || || || [[빌헬름 리스트]] || 육군 || 1880 || 1971 || || || || || [[알베르트 케셀링]] || {{{#blue 공군}}} || 1885 || 1960 || || || || || [[에르하르트 밀히]] || {{{#blue 공군}}} || 1892 || 1972 || || [* '''[[유대인]] 출신 장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과 다르다. 항목 참조.] || || || [[에르빈 폰 비츨레벤]] || 육군 || 1881 || 1944 || 처형 || [* 발퀴레 작전 적극 가담자. 후일 이로 인해 처형당한다. 그것도 피아노 갈고리줄에 묶여서... 여담으로 히틀러는 이들의 처형 장면을 비디오로 찍게 했으며 그것을 보고 즐거워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 || || [[페도어 폰 보크]] || 육군 || 1880 || 1945 || 폭격으로 사망 || [* 중부집단군 사령관 재임 당시, 클루게 원수와의 통화에서 학살 명령에 반대하는 내용이 부하 장교들의 진술로 확인되었다. 동부전선의 다른 집단군에 비해 중부집단군 점령 지역에서 인종 범죄가 적었고, 오히려 카틴 숲 학살을 밝혀내게 된 것도 중부집단군 사령부이다.] || || || [[후고 슈페를레]] || {{{#blue 공군}}} || 1885 || 1953 || || || ||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육군 || 1856 || 1941 || 1940.10.31 || || [*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원수였으며 체코 합병 후 국방군의 명예원수로 임명된다. 임명 후 28 보병 명예연대장을 맡았다.] || 명예진급 || || [[에르빈 롬멜]] || 육군 || 1891 || 1944 || 1942.06.22 || 자살 || || || || [[게오르크 폰 퀴힐러]] || 육군 || 1881 || 1968 || 1942.06.30 || || || || || [[에리히 폰 만슈타인]] || 육군 || 1887 || 1973 || 1942.07.01 || || || ||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육군 || 1891 || 1957 ||<|2> 1943.01.30 || || [* 독일 역사상 '''유일하게''' 항복한 육군원수라기 보다는 최초로 항복한 원수. 그 전까지는 원수가 항복한다는 전례가 없었으므로, 싸우다 죽으라고 내던지다시피 수여한 계급이다. 그러나 그 의미가 너무 노골적이라 파울루스는 "보헤미안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순 없다"는 말을 남기고 진급 직후 바로 항복한다. 그러나 원수 계급장을 패용하지 않았으므로 파울루스를 본 소련군 장군들은 그가 여전히 상급대장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빡친 히틀러가 파울루스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장남인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와 교환하려 했다는 말이 있는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에서 언급된 얘기지만 증명된 바는 없다. 파울루스를 히틀러가 직접 잡아 죽이기 위해 교환하려 했다는 썰에 대해서는 아예 근거가 없다.] || 항복 || || [[카를 되니츠]] || {{{#red 해군}}} || 1891 || 1980 || || [* 히틀러의 정치적 유언에 의해 총통의 권한 중 대통령 직책을 물려받은 인물. 히틀러는 되니츠가 전쟁을 계속하길 바랐으나, 그는 신속하게 항복 절차를 진행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민간인들을 서방 점령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 || || [[에른스트 부슈]] || 육군 || 1885 || 1945 ||<|3> 1943.02.01 || 옥사 || [* 타지에서 옥사한 사람 중 클라이스트와 더불어 계급이 가장 높다.] || ||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육군 || 1881 || 1954 || 옥사 || [*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에서 유화 정책을 펼친 것이 오히려 소련 수뇌부의 반감을 사게 되어 인종 범죄에 동조하지 않았음에도 '소련 인민을 이간질한 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한 달에 한 번 가족들에게 엽서를 쓰는 것조차 마지막 7개월 동안에만 허락되었다. 사후 매장 장소조차 기록이 없다.] || || ||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 육군 || 1881 || 1954 || || || || ||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 {{{#blue 공군}}} || 1895 || 1945 || 1943.02.16 || 뇌종양 || [* 독일군 최연소 원수로 그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 동생. 2차 대전 독일 공군에서 최고의 지휘관으로 손꼽힌다. 더운 여름에는 군복 상의를 벗어둔 뒤 셔츠 차림으로만 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야전에서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는 등 무척 활동적인 기상의 소유자. 그가 뇌종양에 걸려 일찍 예비역에 편입되지만 않았으면 독일 공군 전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후배 조종사인 [[아돌프 갈란트]] [[중장]]이 "각하께서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었으면..."하고 탄식했을 지경.] || || || [[발터 모델]] || 육군 || 1891 || 1945 || 1944.03.31 || 자살 || [* 전공 만큼이나 사진도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인데, 정작 원수 지휘봉을 든 사진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식 지휘봉은 모델이 원수 진급 이후 단 한 번도 '군 예식 행사'에 참석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휴가 한 번 받지 못하고 북부, 남부, 중부 집단군 사령관을 '''2개월 간격으로 겸임'''하며 최전선을 달렸다. 서부전선에서는 총사령관까지 겸임) 사진이 없고, 약식 지휘봉은 모델 자신이 '''들고 다니는 게 귀찮다'''며 방치(…)했기 때문. 다만, [[아르덴 대공세]] 당시 몸소 교통 정리할 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찰봉≧원수 지휘봉~~] || || || [[페르디난트 쇠르너]] || 육군 || 1892 || 1973 || 1945.04.05 || || [* 정식 원수 지휘봉은 제작 기간이 오래 걸려서 쇠르너와 하단의 폰 그라임은 하사 받지 못하였고, 이들 두 사람의 원수 진급은 한창 계급 인플레가 심각하던 종전 말, 히틀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졌기에 전사학자에 따라서는 독일 국방군의 마지막 원수 진급은 발터 모델이라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 || || ||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 {{{#blue 공군}}} || 1892 || 1945 || 1945.04.25 || 자살 || [* 진급날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진급은 히틀러가 벙커 안에 있을 때 이루어졌다. 이유는 괴링이 배신을 때렸기 때문. 그래서 나중에 그는 '''난 공군 원수지만 내가 지휘할 공군이 없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한다. 직후 카를 되니츠 원수와 만남을 가진 지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 되니츠는 이 마지막 만남에 대해, 1958년 펴낸 그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에서 "우리는 매우 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라고 술회했다.] || || [[분류:독일 국방군 원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